일상다반사

다단계 마케팅의 실질적인 위험성

흑심성자 2018. 8. 24. 13:11
다단계 마케팅 은 "제조업자 → 도매업자 → 소매업자 → 소비자"와 같은 일반적인 유통경로를 거치지 아니하고, 다단계, 즉 다 단계의 회사 및 판매원들이 거래에 참여하는 유통방식이다. 유통방식뿐 아니라 후원수당에서도 다단계적 개입이 이뤄지는 데, 이렇듯 다단계의 본질적 의미에서 후원수당의 단계적 배분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위키백과

뭐 따지고 보면 다단계는 전통적인 유통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이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 중 하나가 '소문'. 요즘 말로 한다면 소셜 네트워크는 어찌보면 다단계를 가장 잘 활용한 형태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다단계에 대해서 선악은 없다. 그저 그걸 어떻게 활용하고 그 속에서 어떤 속임수가 있느냐에 따라 결과론적인 폐해에 따라서 선악이 구별된다고 본다. 

난 다단계 회사나 이를 가지고 물건을 판매해 본 적은 없다. 실질적인 경험은 전무하다. 단지, 몇 번 그 유혹에 빠져든 적은 있다. 

처음으로 다단계가 내 생활 속으로 다가온 건 94, 5년 쯤으로 기억된다. PC통신 하이텔을 통해서 알바를 써치하던 중, 페이도 좋고 위치도 괜찮은 건수가 눈에 띄었다. 바로 연락을 해보니, 여의도 쪽에 와서 상담과 함께 면접을 보라고 했다. 당일인가 다음 날 바로 찾아가 보니, 인력사무소 였었다. 실장이라는 분이 찾아온 알바 지망생들을 모아 놓고 관련해서 설명을 해 준다. 여기가 암웨이 라는 다단계 회사이며, 다단계 영업을 하라는 것은 아니고, 등촌동에 있는 창고형 매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주문 들어온 물품을 챙겨 담아주는 것이 주된 업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단계 회사라서 거부감이 있으면 그냥 가도 된다는 얘길 했었다. 

페이가 좋아서 였을까 거기서 돌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1시간 알바 페이가 2천원 내외였던 시절인데, 여긴 시간당 4천원으로 상당히 보수가 좋은 알바였다. 여튼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 알바 면접은 간략히 진행되었고 실제 현장으로 이동했다. 현장을 방문해서 실제 해야 되는 일과 규칙 등을 알려주고 언제부터 나오라는 일자와 시간대를 배정 받은 후, 귀가 했다. 
여기가 정말 꿀이었던 점은 당시 집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거리였기 때문이다. 버스로 이동해도 10분이 체 되지 않았다. 오전 4시간 근무로 일일 1만 6천원. 1시간 단위로 50분 일하고 10분 휴식을 주었다. 
일하다 보니 알바 몇몇은 실제로 암웨이 다단계 판매에 등록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매번 쉬는 타임때마다 이런 저런 얘기가 들려 주었다. 다이아몬드가 어떻고 얼마를 번다느니, 여기 영양제나 세제가 좋다느니 등등. 뭐 그러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당시엔 그저 페이 좋은 알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다단계에 대한 개념도 왜 해야 하는지도 별로 피부에 닫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저녁 모임을 만들어서 판매 실적과 공략법(?) 등에 대해서도 서로 공유한다느니 하면서 집요하게 얘기하는 그들이 좋게 보이지도 않았고, 뭔가 엿장수가 가위질로 사람 꼬득이는 듯 보였기에 거부감이 더 컸던 듯 하다. 

아쉽게도 대학 방학 기간에만 일 할 수 있었기에 2개월 정도로 암웨이 알바는 막을 내렸다. 내 인생에 파장은 남기지 않은 체로.. 

그러다가, 2001년 쯤으로 기억된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잠시 공백기가 있던 시절이었다.  대학 동기중 하나가 어느 날 삼성역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연락이 왔다. 공짜 밥에 흥쾌히 만남을 가졌는데, 식사 후 커피를 마실 때 쯤, 본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단계 얘기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삼성역 일대가 다단계 회사로 넘쳐났다고 한다. 친구가 들려 준 이야기의 요지는 이랬다. 
어릴 때 같은 동네 사는 형 누나가 있는데, 이 분들이 현재 여기서 최상층 단계에 있고 신화적인 존재란다. 자기는 그 라인으로 들어와서 같은 시즌에 들어온 사람들보다 성장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그래서 나에게 추천한다. 정도로 기억된다. 
뭐 그리 관심은 가지도 않았고 끌리는 일도 아니었기에 건성으로 들었던 듯 하다. 그러다가 집에 있기도 심심하기도 해서 이 친구가 3일 동안만 강의를 들어 본 후, 결정을 하라는 말에 그리하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위험한 결정을 한 것이다.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서두에서 얘기한 암웨이에 대한 경험이 작용했다. 일단, 암웨이는 나에게 고마운 꿀알바였다. 다단계 판매는 내가 하고 안하고를 결정하면 되는 문제였고 당시에는 내가 관심도 두지 않았고 하지도 않았다는 생각에 이미 난 안한다로 결론을 내린 상태로 3일 강의를 수락한 것이다. 들어봐야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기에 결론은 똑같다 였다. 

첫째 날, 쭐래쭐래 10시까지 가서 가볍게 인사하고 강의실에 앉아서 강의를 듣기 시작한다. 강의 내용은 대체로 다단계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들에 대해서 반론하는 내용과 자신들의 성공사례, 그리고 신화적 존재에 대한 수입액 등에 대해서 열거한다. 그러면서 편법적으로 빠른 성장을 위해서 사람들이 무리하게 구매하는 패턴을 거론해 준다. 비판적인 내용인 듯 하지만, 실질적으론 그런 방법을 써도 좋다라는 당위성을 은밀하게 주입하는 내용이다. 강사는 바뀌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별거 없네 정도로 내 스스로 방어한 듯 하다. 

둘째 날, 셋째 날도 강의 내용은 동일 했다. 중간 중간 나에게 누구 라인이냐는 질문과 누구라고 얘기하면 "어머 정말이요? 그 분 라인이세요? 축복 받으셨어요? 꼭 하세요" 뭐 이런 추임새가 이어진 것도 동일했다. 

그러나 달라진 점 하나가 있었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아니 어떻게?' 왜?, '미친 거 아냐' 라고 내 스스로 욕지기를 토해낸다. 바로 사고(생각) 프로세스의 변화였다. 
기존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일부의 케이스겠지. 처럼 의구심이 먼저 들고 이를 찾아보고 비교 분석을 했다고 하면, 3일 동안 동일한 내용을 하루 종일 반복적으로 듣고 난 후, 이 의심에 대한 프로세스가 사라졌다. 동작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믿기지 않지만, 당신에 실제로 그랬다. 철저히 내 결론은 시작 때부터 이미 "난 안할 겁니다"였다. 근데, 이게 의심 프로세스가 사라지면서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떠나서 이미 저 내용은 사실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설마 이걸 거짓말 하겠어? 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것도 자동적으로 각인된 사실로 인지하면서 출발한 듯 했다.  

그렇다. 생각이 마비! 세뇌 된 것이다. 말로만 듣던 사상교육이 이런 것이지 않을까? 
생각의 회로에 그들이 얘기한 프로세스만 남아 있고 이게 과연 될 수 있냐 라는 검증의 내 방어선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미 내 대답은 "해볼께요" 변해 있었다. 마지막 날 저녁. 라인의 신화적 존재와 대면했다. 내면의 갈등은 없었다. 이미 끝난 게임이다. 먹이사슬의 끝자락에 싱싱한 날 것 그대로가 벌거 벗은 채 스스로 상납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그런 찰나에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내 앞에 앉아 있는 그 존재의 눈을 보니 뭔가 퀭하고 굶주린 듯한 맹수의 뭔가로 보였다. 주변을 보았다. 그 주변도 비슷했다. 그 눈을 본 순간, 내 대답은 "아니오. 관심 없습니다."라고 튀어 나갔다. 순간 흐르는 정적! 흔들리는 눈동자들 틈에서 당황한 그들이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보여진다. 친구가 호출된다. 친구도 당황한 모습이다. 친구에서 귓속말로 뭐라고 하고 나와 친구는 따로 나와서 술 한 잔을 하게 되었다. 친구는 집요하게 계속 왜 안하냐? 기회 좋다. 너 속이는 거 없다. 등등 으로 친구는 섭섭함을 토로했다.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 한마디를 했다. “친구야, 난 너랑 10년이건 20년이건 서로 속상한 일 있거나 좋은 일 있을 때, 편하게 불러서 술 한 잔 할 수 있는 친구로 오래도록 남고 싶다. 그런데, 내가 이걸 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미안하고 우리 편하게 술 마시자” 그 후 친구는 말이 없었다. 

당시 경험으로 내가 느낀 다단계의 가장 큰 해악은 철저하게 개인들의 인간관계를 소비, 소진하는 습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비된 관계는 좋건 싫건 결과를 내야 된다. 경제 즉, 돈이 결부되었기에 좋게 끝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철저히 피라미드 형태로 내가 소비한 인간관계를 내 발 밑 아래에 딛고 올라가는 구조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결국 희생자가 발생한다. 다만, 모두 다 그 끝이 내가 아니길 바라는 구조이다. 동료는 존재치 않는다. 그저 경쟁자일 뿐이다. 물건 하나 값 때문에 또는 몇십만원 차이로 내보다 제가 먼저 윗단계로 간다? 용납을 못한다. 무리를 해서라도 빚을 내서라도 내가 먼저여야 한다. 

독일 나치의 괴벨스 선동
그건 이론이 아니었다. 그걸 직접 체험해 보니 정말 무서웠다. 인간이, 나란 존재가 이리도 나약한 존재일 수 있는가란 회의감이 당시에 몰려왔었다. 지금이야 뭔가 술안주 삼아 풀어 놓는 얘기꺼리이긴 해도 당시, 그리 홀리는 상황이 생각만 해도 무섭다. 아마 사이비 종교도 그렇고 정치적 선동도 비슷할 것이다. 속는 사람이 바보가 아니다. 그만큼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이를 악용하는 그들이 악인 것이다. 소셜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이걸 이용하는 사람들이 나쁜게 아니다. 악용하는 사람이 데빌인 것이다. 개인으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이를 악용하는 사람 또는 단체가 욕먹고 단죄되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결국, 다단계의 위험성은 이런 인간의 나약한 심리를 교묘히 파고 들어서 현혹하는데 있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가 될 수 있다. 합리적 의심과 철저한 검증도 중요하지만, 악용하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단죄가 현실적으로 더욱 요구되는 시대이다.